▲1965년 4월 미국 해병대가 다낭 해변에 상륙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중국 영향권에서 빼내려는 미국 욕심이 원인/달러로 남베트남 유혹해 민족 분단 상태 유도/미국의 패전 상징하는 ‘마지막 헬리콥터’ 탈출/한국군 파병 ‘월남 특수’ ‘전투 수당’으로 가려/국제 관계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 잊지 말아야-
[경상뉴스=김용수 대기자]베트남 전쟁 종전 5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 이 전쟁이 미국과 세계에 남긴 역사적 교훈과 현재의 함의를 되짚어보는 시점이다.
베트남 전쟁은 냉전 시기의 이념적 갈등이 극명히 드러난 전쟁으로, 군사적·정치적·사회적 측면에서 미국과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번 글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배경, 전쟁이 남긴 교훈, 그리고 현대에 주는 시사점을 자세히 살펴본다.
1975년 4월 30일. 반세기전 사이공이 함락됐다. 월남(남베트남)으로 불리던 베트남 공화국 (The Republic of Vietnam)은 종말을 맞이했다. 베트남은 세상이 뒤집혔는데 베트남 밖은 달라진 게 없었다. 사이공 함락 직후 가족과 함께 이주한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비엣 타인 응우엔(Viet Thanh Nguyen, 1971~)은 대표작 ‘동조자(The Sympathizer)’에서 그해 4월은 더욱 잔인했다고 적었다.
인구 1600만 명인 나라가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이들의 불행은 세계적 아픔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긴 전쟁의 원인 제공자가 사라졌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미국이 전쟁 개입 정당화의 근거로 내세운 도미노 이론도 현실화 되지 않았다. 남베트남이 패망했으니 월맹 (북베트남)으로 불린 베트남 민주공화국 (The Democratic Republic Vietnam)을 스폰서로 한 공산혁명이 주변 나라들로 산불처럼 퍼져나갈 경고는 피해망상에 가까웠다. 미국은 도미노가 쓰러지기 시작하면 북쪽 멀리 일본, 한반도마저도 위태해진다고 했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종식과 함께 시작된 옆의 나라 캄보디아의 집단학살이 ‘신 스틸러(scene stealer)’였다.
1975년 남베트남은 바닥에 굴러떨어진 화병(花甁)처럼 산산조각 났다.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독립을 선언하고, 식민 통치자 프랑스를 상대로 민족 해방 투쟁을 벌였다. 프랑스 군대와 미국의 원조는 난공불락처럼 보였지만, 1954년 프랑스는 패해 베트남을 떠났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위 17도선으로 양분된 베트남 이남에 베트남 공화국이 들어섰다.
세계를 자유민주세계와 공산독재세계로 양분한 미국은 북베트남이 전쟁 후 달아오르기 시작한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 투쟁 열기의 상징과 모델이 될 것을 우려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이 개입해 ‘베트남 공화국’의 탄생을 도왔다. 이 과정은 한반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체제 경쟁 대상과 대립되는 국가이념과 이를 상징하는 지도자를 세웠다. 국가의 무력 수단을 조직했으며, 원조를 통해 통치력을 제공했다. 끝으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반공전선 방어에 기여토록 했다.
신생 베트남 공화국은 세계가 양분된 냉전구도 속에서 자유세계, 곧 미국의 선의와 능력을 과시하는 수단의 기능이 강했다. 자유세계의 거실을 장식하는 화병과 같았다. 전형적인 서구 식민 통치국 프랑스를 몰아내고, 전쟁을 하면서도 나라 만들기에 성공한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남북을 막론하고 베트남의 국민 영웅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의 지도력과 민족 통일을 위한 집념을 무력화하기 위해 미국은 남베트남을 달러의 힘으로 유지했다. 이 화병을 보라는 듯 애지중지했다.
본래 제네바 합의에는 남북 베트남이 2년 내에 통일을 위해 총선거를 실시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고 미국은 남베트남을 자유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으로 잉태된, 미국과 우방들이 지켜야 하는 신생국으로 부각했다. 이를 위해 1954년 “동남아시아 조약기구 (SEATO)”를 창설했다. 소련의 팽창주의를 막기 위해 만든 유럽의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를 본떴다. 거금을 들여 이 화병을 세상에 보이기 위한 전시관을 만들었다. ‘자유세계’라는 현판을 걸었다. 화병이 별로 아름답지 않다는 국제 사회의 지적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이 정당성이 없는 미제국주의의 도구이므로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들에게 화병을 파괴해야 하는 당위성은 뚜렸했다. 미국이 자신을 자유 지킴이로 설정하고, 그 위치를 유지해 가려면 민족 분단이란 무대가 필요했다. 분단은 미국의 지속된 개입을 뜻했다.
북베트남의 파괴 공작을 저지하기 위해 먼저 남베트남 현지 인력으로 경비대를 만들어 화병을 지키게 했다. 하지만 경비대는 약했다. 지키고 있는 물건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약하니, 경비 업무에 적극적일 수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원조를 제공하면서 ‘강도의 소굴(house of thieves)’이라 불린 군부 독재를 키웠다. 남베트남인들의 자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끝내 미국은 자국의 무장 경비대를 대거 파견해 화병을 보호하려 들었다. 핵무기를 뺀 미국이 만들어 낸 모든 무기를 들고 갔다. 미국의 화공약품 기업의 이윤을 높여준 고엽제도 포함됐다. 사실 전술핵 사용도 검토했지만, 국제 사회의 비난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다.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 1966.7.10.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의 영향권에 있는 주변 소국의 경비 병력도 불러들였다. 한국이 대표적이다.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고 노래를 부르며 이들은 남중국해를 건넜다.
이 병력은 미군의 10분의 1 정도의 비용으로 유지가 가능했다. 하지만 별 투정은 없었다. ‘전투 수당’ 또 ‘월남 특수(特需)’란 유행어가 통증 완화제 역할을 했다. 파병 군인들에게는 ‘베트남 =인도차이나=한반도’, ‘호찌민=모택동=김일성’이란 전략적 도식이 주입됐다. “남북으로 갈린 땅 월남의 하늘 아래,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는 외침도 3000킬로미터의 거리감을 씻어주었다.
이 화병이 만병의 근원이었다. 모두 300만 명의 미군이 남베트남 땅을 밟았다. 이들은 뚜렷한 전선도 없고 피아(彼我) 구분도 어려운 전장에 왜 투입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든 1년 (정확히는 11개월)을 살아남으면 귀국할 수 있었다. 워싱턴의 펜타곤 (국방부)의 판단에 따라 끌려오듯 투입된 전장에는 동기도 목적도 혼란스러웠다. 아편 등 마약 재배가 흔한 인도차이나에서 저가의 고급 마약에 빠져드는 미군 병사가 늘어났다.
타락한 남베트남 군부는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줄 뻔히 알면서도 미국산 무기를 빼돌려 팔았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한, 마약과도 같은 기생(寄生) 경제로 나라가 유지됐다. 남베트남은 미국의 군산복합체들이 개발한 파괴 기술과 도구의 연습장이자 시장이기도 했다. 나라가 더 많이 파괴될수록 더 많은 원조가 흘러 들어오는 기현상이 자리잡았다.
사실 화병을 지탱하는 경비는 빈곤, 인종차별 등 미국이 안고 있는 사회 문제 해결에 투입될 재정이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빈민, 소수민족, 노약자가 보호받는 ‘위대한 사회 (the Great Society)’를 만들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는 위대한 미국 사회보다는 호찌민 없는 세상에 더 집착했다.
여러모로 남베트남이란 화병은 처음부터 평평하지 않는 표면에 불안하게 놓여 있었다. 안정감을 확보하지 못했다. 당연히 민족해방 전선과 이를 지원하는 북베트남은 화병 전시대에 진동을 가해 화병이 굴러떨어지도록 하는 전략을 짰다. 많은 희생이 요구되는 전면 공격으로 전시관을 무너뜨릴 필요는 없었다. 동시에 미국인들에게 쓸모없는 화병 하나 지키자고 전쟁을 지속하는 미국 정부의 어리석음과 파괴성을 호소했다. 미국 사회는 이 화병 때문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반공주의와 반전주의로 갈렸다.
결국 20년 만에 결국 화병은 굴러떨어졌다. 미국은 화병의 부서진 조각들을 제대로 청소도 못하고,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부서진 조각들이 아픔과 치욕의 상징으로 남아 뒹굴었다. 날카로운 칼날 또 뾰족한 창끝처럼 변신한 자기(磁器) 조각들은 미국의 역사적 우월감, 자부심,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양심을 찌르고 벴다. 이 상처들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올해 4월은 베트남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주년(周年)이다. 60년 전인 1965년 4월 7일, 존슨은 볼티모어 소재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직접 개입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한 달 전인 65년 3월 8일, 미국은 남베트남에 첫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미 해병이 남베트남 다낭 해변에 상륙하면서 베트남 전장(戰場)의 미국화는 시작됐고, 이에 대한 설명이 요구됐다. 존슨은 늘 아시아 청년들이 해야 할 일을 미국의 청년들이 떠맡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은 파리 평화협정을 맺은 1973년까지 전쟁을 이어가는데 동기 부여가 필요했다. 존슨이 제시한 베트남 전쟁 개입의 명분은 “정복 없는 평화(Peace Without Conquest)”였다.
전쟁은 상대의 것을 차지하거나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한다. 영토, 인구, 자원, 헤게모니 등이 전쟁의 목표다. 이들을 통해 내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해지면 (또는 상대가 약해지면) 평화가 보장된다는 신념이 미국의 전략적 사고이다. 압축하면 나라는 전쟁을 피해서는 안된다. 미국의 초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로마제국의 경구를 인용해 미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다.”(To be prepared for war is one of the most effective means of preserving peace)
존슨은 이 전략적 사고를 확대시켰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두려워 하지 않겠다’를 넘어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존슨의 사고를 더 깊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존슨의 시각에서 베트남, 나아가 세계 평화의 파괴자는 베트남 밖에 있었다. 정상적인 사고 체계라면, 평화의 파괴자는 눈앞에서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이다. 베트남 전장에서는 미국의 적은 남베트남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민족해방전선과 이를 지원하는 북베트남이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들을 주적으로 보지 않았다. 전쟁의 원인을 중국(중공)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자주성을 무시하고 이들을 괴뢰들로 보았다.
이 순간 전략적 혼돈이 발생한다. 치열하고 끈질기게 자신에게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는 공산 무장세력은 꼭두각시였다. 이 관점에서 싸움의 목적은 확실한 전리품이 아니라 추상적인 메시지가 된다. 구체적으로 남베트남에 대한 폭격은 북베트남에 보내는 메시지이고, 북베트남에 대한 폭력 사용은 중국을 향한 메시지였다. 상대가 나의 메시지를 알아 듣지 못했다고 느끼면, 메시지를 접든지 아니면 파괴를 증폭시켜야 한다. 미국은 후자를 택했다.
존슨은 악의 원천을 베트남의 공산 세력을 뒤에서 이들을 조종하는 베이징으로 설정했다. 그의 표현대로 베트남 전쟁은 ‘깊게 드리우는 공산 중국의 그림자(the deepening shadow of Communist China)’와의 싸움이었다. 중국은 거의 모든 대륙에서 폭력의 세력을 지원하는 나라이며, 현재의 베트남 사태는 중국의 뿌리 깊고폭 넓은 공격적 목적 추구의 연장일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인도차이나에서 미국의 적은 당시 6억 명이 넘는 중국인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중국이 드리운 침략의 그림자는 제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그랬듯, 특정 전선 또는 점령 지역에서 멈출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도미노 논리와 반중(反中) 전략 사고가 만났다. 존슨은 중국의 멈출 수 없는 침략성을 증거로 한국전쟁을 제시했다. 그는 구약 성서를 인용해 중국의 팽창주의를 적극 저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Hitherto shalt thou come, but no further…/욥기 38장 11절)” 존슨이 인용하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성경구절의 메시지가 강하다. “네 오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존슨은 베트남 사태의 본질인 민족 해방 열기를 간과했다. 중국의 지정학적 오만이 증폭되어 눈에 들어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베트남 사태의 해결책은 비교적 간단하다.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을 중국의 손아귀에서 빼내 오면 된다. 존슨은 북베트남 사람들이 중국의 부추김과 원조에 고무되어 남베트남을 붕괴시키려 애를 쓰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은 안다고 했다. 배고픔을 씻어줄 양식, 몸의 건강, 배움의 기회, 나라의 발전, 또 물질적 빈곤의 속박으로부터의 탈출, 또 끝없이 싸우는 대신 주변 국가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존슨은 공산 세력에게서 베트남의 독립과 자주의 열망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서 나온 해결책은 달러였다.
일단 호찌민이 중국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 협상에 임하면 반대급부로 경제 원조와 개발기금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존슨은 베트남을 넘어 인도차이나 전체의 개발 청사진을 내놓았다. 남북으로 4000킬로미터를 흐르는 인도차이나의 젖줄 메콩강 개발을 위해 미국은 1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메콩강 지역을 개발할 경우 미국 테네시강 유역 종합 개발(Tennessee Valley Authority)을 초월하는 규모의 식량과 물, 전력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그 결과 의료 혜택이 늘어나, 매년 수천 명이 치료가 가능한 데도 병으로 죽어가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평균 수명이 40세인 현실을 종식할 수 있다고 외쳤다. 메콩강 개발을 위한 인력 양성에 요구되는 교육기관이 세워지면 전체 교육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 개발 사업에는 북월남을 지원하는 소련도 참여할 수 있으니 평화 구축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또람(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베트남 하노이에 위치한 당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회담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고 있다. 2025.4.14. AP/연합뉴스
장기적 개발 정책의 열매가 맺힐 때까지 미국은 넘치는 잉여 농산물을 남북 가리지 않고 베트남에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의 창고에 밀과 옥수수, 쌀과 면화가 넘쳐나는데, 베트남에서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는 것을 자신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베트남의 공산 세력이 미국의 제안을 거부할 경우 그 결과에 대해서도 존슨은 구약 성서를 인용해 경고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명기 30장 19절) 존슨은 이 연설에서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에 살길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을 경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상상이 어렵지 않다. 신명기 같은 장에 나온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미국의 베트남 상처에는 여러 이름이 붙어 있다. ‘미국의 비극(American Tragedy)’과 ‘미국의 가장 긴 전쟁(America’s Longest War)’은 일정한 객관성을 요구하는 역사 교과서에 자주 쓰이는 제목이다. 주관적이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평가로 ‘힘의 오만(Arrogance of Power)’이있다. 아칸소주 출신 제이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이 1966년 사용한 표현이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천명한 존슨의 베트남 전쟁 개입 청사진의 제목으로 ‘힘의 오만’이 정확하다. 첫째, 베트남의 자주, 독립, 주체성을 무시한 오만. 둘째, 식량, 물, 전력으로 민족 해방 투쟁의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오만. 셋째,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베트남의 민족 해방 투쟁에는 죽음의 길만이 있다는 경고의 오만 등이다.
그의 백악관 대변인 빌 모이어스에 따르면 존슨은 존스 홉킨스 대학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호찌민이 자신의 제안을 결코 거절할 수 없을 것(Old Ho can’t turn me down)”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존슨이 틀렸다. 4월 8일 베트남 민주공화국 수상 팜반동은 협상의 네 가지 선제 조건을 제시했다. 그 첫째가 남베트남에서의 완전한 미군 철수였다. 협상은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흔히 ‘마지막 헬리콥터’로 불리는 1975년 4월 29일의 절박한 사이공 탈출 장면은 남베트남이라는 화병이 얼마나 철저하게 부서졌는지를 보여준다. 이 불행한 역사의 파편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면 안된다. 이 조각들에 서려 있는 교훈이 있다.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국제 관계에서 분쟁, 대립과 전쟁의 상대를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나라와 민족은 자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국제 상황과 환경의 도전에 반응한다. 하노이는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조종을 받는다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사고가 베트남에서 미국의 판단을 흐렸다. 남베트남을 무너뜨리고 베트남에서 미국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서 북베트남과 민족해방 전선은 100만 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면서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희생이 아니다. 외세는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일단 몰아내야 한다는 자주를 위한 투쟁의 유전자(DNA)가 존재한다.
둘째, 개인의 삶과 국가 운영은 다르지 않다. 당사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가치를 동맹이 지켜낼 수 없다. 더욱이 그 가치가 베트남 전쟁에서처럼 추상적이거나 일방적인 경우, 희생의 요구는 압력과 간섭으로 받아들여진다.
미국은 베트남에 풍요, 자유, 민주 절차를 정착 시켜주겠다고 했다. 전쟁 당시 남베트남인들에게 미국이 제시한 풍요의 증표는 사이공의 암시장이, 자유는 매춘업소가 상징했다. 민주주의는 군부 독재에 정당성의 페인트칠을 해 준 부정선거로 지탱됐다. 이에 대해 호찌민은 미국이 남베트남인들을 매수해 현혹하고 서로 싸우도록 갈라놓는다고 했다. (“They follow the policy of buying up, deluding and dividing our people.”) 미국은 마약과도 같은 달러를 이용해, 지배하려는 나라의 민족성을 파괴한다는 뜻이다.
셋째, ‘힘의 오만’은 극복하기 쉽지 않은 중독성이 있다. 미국의 경제 규모라면 국제 교역 구조와 동맹 관계를 미국의 국가적 이익에 맞게 휠 수 있다는 오만이 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를 지배하고 있다. 풀브라이트가 남긴 경구를 새겨야 한다. 베트남에서 미국이 겪은 불행의 원인은 힘이 부족이 아니었다. 잘못 선택한 힘의 과잉이 초래한 목적 상실이 안겨준 무력감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며 밀어붙이는 일방적 정책들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함인가? 답이 명확하지 않다.
패망한 남베트남이 남긴 파편 중 꼭 한국이 간직해야 할 것이 있다. 그 조각에 이런 외침이 배어 있다. 무료로 주어진 것만큼 비싼 것은 없다. (“Nothing… is ever so expensive as what is offered for free.”) 소설 ‘동조자’에 나오는 남베트남 패장의 독백이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엄청난 군사 장비를 제공했다. 하지만 자국의 이익 계산에 따라 남베트남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에 이 무기 체계의 운용에 필요한 추가 원조를 거부했다. 남베트남은 50년 전 그렇게 산산조각 났다.
베트남 전쟁 종전 후 미국은 어떻게 되었나? 역시 소설 ‘동조자’가 잘 정리해 준다. 아무리 잘못을 많이 했어도 미국은 자신이 영원히 죄가 없다고 믿는다. 그리고 늘 자신의 무죄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innocent)과 정당한 것(just)은 성격이 다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적어도 죄책감이 있는 이들은 최소한 자신이 얼마나 어두운 짓을 할 수 있는 지는 알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미국은 자신의 상처는 치유하려 했지만, 타인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유발한 자신의 어두운 행동은 지금도 부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