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인 김명배(93·사진 가운데) 할아버지가 27일 오전 일본 혼슈 도야마현 도야마시에 있는 후지코시 주주총회장 앞에서 “죽은 아내의 한을 풀기 위해 이곳에 왔다. 후지코시는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라”고 외치고 있다. 도야마/김소연 특파원
-경기도 용인에서 일본 도야마 직접 찾아/강제동원 후지코시 주총장에서 발언 –
[경상뉴스=김관수 기자]“저는 여기에 부탁이 아니라 경고하러 온 겁니다. 후지코시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합니다.”
27일 오전 10시 눈과 우박이 번갈아 내리는 일본 혼슈 도야마현 도야마시에 있는 기계·부품회사 후지코시의 주주총회장.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인 김명배(93) 할아버지는 구로사와 쓰토무 후지코시 사장을 향해 당당하게 외쳤다. 90대인 김 할아버지가 경기도 용인에서 일본 도야마까지 한걸음에 달려온 것은 강제동원 피해자였던 죽은 아내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주총장에 아내의 영정 사진을 들고 들어간 그는 “집사람이 생전에 (후지코시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것이 화가 난다”며 “드디어 대법원에서 이겼다. 후지코시는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 뒤에 숨지 말라”고 분노했다.
김 할아버지의 아내 고 임영숙씨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12살 때인 1945년 3월, 일본인 담임교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근로정신대에 지원해 군수 기업인 후지코시로 가게 됐다. “좋은 환경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탕발림에 도야마까지 왔지만, 현실은 달랐다. 먹을 것은 부족하고 하루 8시간 줄로 철을 갈아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노동을 해야 했다. 임금도 받지 못한 임씨는 해방 두달 뒤인 1945년 10월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임씨는 지난 2003년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후지코시를 상대로 일본 도야마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지만, 다음 해인 2004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 재판은 일본에서 패소했다. 김 할아버지는 아내를 대신해 2013년 한국 법원에서 소송을 다시 시작했고, 지난달 25일 11년 만에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에서 이긴 원고는 모두 41명이다. 그중 강제동원 직접 피해자가 23명이고, 현재 8명만 생존해 있다.
▲30년 이상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 ‘호쿠리쿠 연락회’와 도쿄·오사카 등에서 참여한 일본 시민들은 27일 오전 주주총회가 열리는 일본 도야마현 공장 앞에서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배상하라”,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구호를 외치며 선전전을 진행했다. 도야마/김소연 특파원
“억울하니까 집사람이 평소에도 후지코시에서 일한 이야기를 자주 했어요. 그 사정을 빤히 아는데, 내가 어떻게 포기합니까.”
40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한 김 할아버지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 재단에서 주는 돈은 받을 수가 없다. 그것은 아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죽는 순간까지 아내의 뜻을 따를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30년 이상 후지코시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을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 ‘호쿠리쿠 연락회’(연락회)도 김 할아버지와의 연대에 나섰다.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일본 시민단체는 후지코시 등 전범 기업의 주식을 확보해 주총에서 항의하는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이날 주총에는 김 할아버지를 비롯해 연락회 회원 13명이 참석했다. 나카가와 미유키 연락회 사무국장은 주총에서 “일본에서 1992년 후지코시를 상대로 첫 소송이 시작됐다. 32년에 걸쳐 여러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재판이 진행됐고, 후지코시는 (한국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했다”며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얻고 미래를 위해서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