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전공노 공동 설문조사
– 조직 내부 악습 여전/하위직이 국·과장 점심 대접/매달 3만원씩 갹출하기도/“전날 메뉴 파악…비위 맞춰야”/“모시는 날 문화 있다” 50.8%-
[경상뉴스=민태식 기자]서울 A 구청엔 ‘식사 보안’이란 것이 존재한다. 하위직 공무원들이 팀별로 돌아가면서 과장·국장 등과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모시는 날’ 문화 이야기다. ‘식사 보안’ 팀이 상사와 밥을 먹는 동안 ‘중식 보안’ 팀은 상사와 식사하는 동료들의 부재로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30분 일찍 복귀한다.
식사 비용은 팀원들 사비로 결제한다. 한 사람당 많게는 매달 3만 원씩 갹출하고 있다. A 구청의 한 주무관은 “전날 상급자가 무엇을 먹었는지 미리 파악하고 메뉴를 선정하는 일부터 식사 때 비위 맞추기까지 모든 과정이 스트레스”라고 토로했다.
하위직 공무원들이 국장·과장 등 상급자와 함께 식사하고 밥값까지 대신 내는 ‘모시는 날’ 구태가 여전히 공무원 사회에 만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언론의 지적이 잇따르자 ‘식사 보안’ 등으로 이름만 바뀐 채 악습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일보와 전국공무원노동조합이 지난 27일부터 29일까지 전국 광역·기초지방자치단체 공무원 등 567명을 대상으로 ‘공직사회 모시는 날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 절반인 50.8%(288명)가 “소속된 관청에 모시는 날 문화가 있다”고 답했다. ‘모시는 날 문화로 인해 불편함을 느낀 적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도 86.5%에 달했다. 모시는 날이 있다고 응답한 288명에게 그 빈도를 묻자 ‘주 1회 이상’이 50.3%로 가장 많았다. ‘주 1회∼월 1회’ 32.6%, ‘월 1회 미만’ 12.8%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비용 지불 방법으로는 ‘팀 운영비’(48.6%)가 절반가량을 차지했지만, ‘팀원들 사비’라고 답한 비율이 36.1%에 달했다. 상급자가 지불한다는 응답은 3.5%에 불과했다. 공직사회의 모시는 날 문화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자 ‘소통의 날’ ‘국과장 식사당번제’ 등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응답도 있다. 한 주무관은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라 악습 그 자체라는 인식이 없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렇지 않아도 박봉에 시달리는 7∼9급 하위직 공무원들이 ‘갹출’의 주된 대상이다. 서울 지역 B 보건소에서는 ‘월간 점심 일정표’에 따라 각 팀은 주 1회 과장, 월 1회 소장과 함께 밥을 먹어야 한다. 이 보건소 한 주무관은 “적은 팀 예산으로는 과장과의 외식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 사실상 사비 결제가 강요된다”면서 “초과근무비로 과장 밥을 사주고, 돈이 없어 내 식사는 거르는 처지에 헛웃음이 난다”고 전했다.
이들에게는 마음 편히 휴식해야 할 점심 식사마저 의전에 목숨 걸어야 하는 업무의 연장이 된다. 메뉴 선정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게 이들의 한탄이다. 메뉴 담당을 ‘먹주임’이라고 부르면서 그날 식사가 취향에 맞지 않았을 경우엔 “이래서 먹주임도 일 잘하는 친구를 시켜야 하는데…”라며 결재를 일부러 미루는 등 몽니를 부리는 상급자도 있다고 한다.
최종덕 전국공무원노조 정책실장은 “윗선 공무원의 무신경함 아래 젊은 공무원들은 매일매일 업무 외적인 고초를 겪고 있다”면서 “기관장급 인사가 직접 나서 정기 실태조사 등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A 구청 관계자는 “소통하는 자리로 이해하고 있었고, 강요한 적도 없다”고 해명했다.